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들이 변한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그 시간의 더께를 머금고 문화로 승화되기도 한다. ‘나무 책상 위 낙서’ 역시 그중 하나다. 단순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낙서에서 시작됐지만, 지금 보면 그 시절 학생들의 감성, 사회 분위기, 유행어, 심지어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우주’다. 오늘은 그 문화유산급 감성을 되짚어보자.
1. 나무 책상이 주던 ‘캔버스’의 자유로움
1980~90년대 학교 교실에는 칠판 먼지와 분필 가루만큼이나 낯익은 것이 있었다. 바로 오래된 나무 책상이다. 그 표면은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고, 군데군데 칼자국과 볼펜, 샤프, 연필로 그려진 수많은 낙서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시절 책상은 학생 개개인의 ‘비밀 공간’이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몰래 적은 짝사랑의 이름, 친구와의 약속,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 유행하던 만화 캐릭터까지. 거기엔 교과서에는 절대 실리지 않을 ‘학생들의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의 책상은 마치 작은 전시장 같았다. 누군가는 그곳에 유행하던 농구 브랜드 로고를, 누군가는 "공부 왜 해?"라는 철학적인 물음을 새겨 넣기도 했다. 공책보다 더 솔직했던 공간이 바로 그 나무 책상이었다.
2. 낙서로 보는 그 시절의 유행과 감성
책상 위 낙서는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소중한 기록이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유행했던 HOT, 젝스키스, 핑클 등의 이름이 새겨진 책상은 수많은 팬심의 증거였다. 누군가는 ‘♥강타’라고 적어 놓고, 옆 친구는 ‘♥문희준’을 덧붙이며 ‘사랑의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수능 대박’ 같은 응원의 문구나, 시험 성적에 대한 절망 섞인 넋두리, 친구 이름 옆에 써 내려간 ‘우정 4ever’는 지금 봐도 웃음이 나는 동시에 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간혹 “선생님 잔다”, “도망쳐~” 같은 익살스러운 문장도 있어 학생들의 장난기와 반항심이 그대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낙서는 단순한 낙서가 아닌, 한 시대의 ‘청소년 문화 아카이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어떤 것이 유행했고,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낙서를 보면 생생히 알 수 있다.
3. 교실이라는 사회 속의 ‘낙서 정치’
낙서는 때때로 공동체의 분위기나 갈등 구조를 보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이름이 ‘왕따’ 대상이 되어 여러 책상 위에 욕설과 함께 적히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인기 많은 친구의 이름이 ‘멋져’, ‘짱’ 같은 수식어와 함께 적히기도 했다.
어떤 학생들은 책상에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그 공간을 방어하듯 덧칠하고 지우며 ‘테리토리’를 형성했다. 한반에서 유난히 정리가 잘 된 책상은 “모범생 자리”라는 인식이 생기기도 했고, 반대로 낙서가 가득한 책상은 “문제아 자리”처럼 낙인찍히기도 했다.
교실 안에서의 서열, 친구관계, 인기투표 등이 이 낙서로 드러났고, 이 또한 지금 보면 하나의 ‘사회학적 관찰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그 낙서는 단지 그림이나 낙서가 아닌, 그 시절 우리가 처했던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의 ‘거울’이었다.
4. 지금은 사라진 문화, 그러나 더 빛나는 기억
요즘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플라스틱 재질의 책상을 사용한다. 표면이 반질반질하고 낙서를 하면 쉽게 지워지기 때문에, 예전처럼 ‘낙서 문화’가 뿌리내릴 공간은 거의 사라졌다. 더욱이 CCTV가 설치된 교실, 학생부의 철저한 관리 시스템,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표현의 수단이 생기면서, 과거처럼 책상에 ‘흔적’을 남기는 문화는 점점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그 낙서들은 우리 세대의 감성과 창의성, 반항심과 사랑, 그리고 성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생활 기록'이었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그때의 낙서를 다시 본다면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건, 아마도 그 속에 우리가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혹시 아직도 창고나 폐교에서 그 시절 책상을 발견한다면, 그 위에 남겨진 누군가의 낙서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그건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시간을 견뎌낸 한 편의 역사다.
5. 마무리하며
오늘날의 책상은 아무리 깨끗해도 이야기거리가 없다. 그러나 낡은 나무 책상 위의 낙서는, 말없이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낙서를 남겼던 우리는, 지금 어른이 되어 그 시절을 추억한다. 그 시절 교실의 책상은 사라졌지만, 그 위에 새겨진 이야기들은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