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한문도 배우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한문은 간단한 것도 있지만 복잡한 것도 있고 서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의미가 다른 것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한문을 좀 더 정교하게 쓰는 훈련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방법중 하나인 한자 쓰기용 볼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작고 날카로운 펜촉, ‘한자쓰기용 볼펜’의 정체는?
1980~90년대, 문방구 한켠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이색적인 이름의 필기구. ‘한자 쓰기용 볼펜’ 혹은 ‘세필 볼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 제품은 당시 학생들과 직장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볼펜의 가장 큰 특징은 펜촉이 매우 얇고 정밀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볼펜이 0.7mm 또는 1.0mm 굵기였다면, 한자 쓰기용 볼펜은 보통 0.3mm, 0.4mm, 0.5mm 등 아주 얇은 펜촉을 채택했죠.
왜 굳이 ‘한자쓰기’라는 용도를 강조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복잡한 획수를 가진 한자를 또렷하게 쓰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齊’나 ‘驫’처럼 획이 많은 글자를 일반 볼펜으로 쓰면 뭉개져 보이기 쉬운데, 세필 볼펜을 사용하면 획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살아났습니다.
이런 특성 덕분에, 단순히 한자뿐 아니라 정교한 필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기였죠.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필기해야 했던 수험생, 도면에 정자체로 메모해야 했던 기술자, 그리고 일일이 수기로 작성하던 행정 서류를 담당한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애용됐습니다.
2. 문방구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필기구 중 하나
당시 문방구에서 볼 수 있었던 한자 쓰기용 볼펜은 대부분 일본 브랜드 제품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제브라(Zebra), 파이롯트(Pilot), 미쓰비시 유니(Mitsubishi Uni)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샤프펜슬이나 중성펜 부문에서 이 브랜드들이 유명하지만, 당시에도 이들 제품은 정확하고 날카로운 필기감, 잉크 번짐 없음, 균일한 필압 유지 등으로 다른 저가형 필기구와는 급이 달랐습니다.
문방구에 진열된 볼펜 중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했고, 케이스 포장까지 되어있는 ‘고급 필기구’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일 선물, 시험 합격 기념 선물로도 종종 이용됐습니다. "이거 비싼 거야, 조심해서 써"라는 말과 함께 받았던 기억이 있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3. 교과서 필기부터 방학 일기까지… 세필의 추억
얇고 정밀한 필기를 가능하게 해준 덕분에, 한자 쓰기용 볼펜은 학창 시절의 필기 문화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특히, 교과서나 참고서에 빽빽하게 줄 긋고 요점 정리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세필 볼펜은 필수 아이템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형광펜과 함께 한자쓰기용 볼펜을 세트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세필 볼펜으로 정리한 후, 위에 형광펜으로 칠하는 방식이죠.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꼭 ‘잉크가 마른 후’ 형광펜을 칠해야 했던 기억도 함께 떠오릅니다.
또한, 일기장이나 독서록, 방학 숙제 등도 정성스럽게 작성하던 시대였기에, 세필 볼펜은 그야말로 ‘정성을 담은 글쓰기’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지금처럼 디지털 기기가 없는 시대였기에, 글씨체 하나로 그 사람의 성실함과 인성을 평가받던 문화도 있었습니다. 그 정성의 도구로서 세필 볼펜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4. 디지털 시대, 다시 주목받는 아날로그 감성
요즘은 대부분의 문서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 작성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필기구 시장은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레트로 열풍’과 함께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향수가 불면서, 세필 볼펜이나 만년필, 노트 필기 문화가 다시 유행하고 있습니다.
SNS에서는 ‘필기 맛집’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자신의 필기 스타일을 공유하는 게시물도 늘고 있고, ‘정리 노트’를 예쁘게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필 볼펜은 필수 도구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더불어, 캘리그래피나 일러스트, 다이어리 꾸미기 등에도 얇은 펜촉은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 쓰기용이라는 명칭은 사라졌지만, ‘정밀 필기용 볼펜’, ‘0.3mm 중성펜’ 등의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는 셈이죠.
5. 마무리하며: 그 시절, 작고 정성스러운 글씨의 향수
한자쓰기용 볼펜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정성을 담은 손글씨의 상징이자, 그 시절 학창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더이상 ‘한자 쓰기용’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여전히 얇은 펜촉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그 감촉, 그 필기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혹시 지금도 필통 어딘가에서 한자쓰기용 볼펜을 발견하셨다면, 그걸로 오랜만에 일기 한 줄 써보는 건 어떨까요? 디지털 텍스트로는 담을 수 없는 감성이, 얇은 펜촉 끝에서 되살아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