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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도 K-드라마가 있었다? 100년 전 한국의 연극·영화 이야기

by 행복한달조 2025. 4. 5.

일제강점기에도 K-드라마가 있었다? 100년 전 한국의 연극·영화 이야기


요즘 한국 드라마는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K-드라마'는 하나의 문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인들이 연극과 영화를 통해 감동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현대의 K-드라마 못지않은 극적인 이야기와 감정선이 가득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공연 예술 세계로 함께 떠나봅시다.

 

1. "신파극" –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던 1920년대형 드라마

1920~1930년대 한국 연극계의 중심은 단연 신파극이었습니다. ‘신파(新派)’란 말은 당시 일본에서 유입된 연극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비극적이고 감성적인 줄거리, 그리고 선과 악의 뚜렷한 대비가 특징입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신파극 제목들만 봐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쌍한 제물》, 《혈의 누》, 《사랑에 우는 여인》 등, 오늘날로 치면 막장 드라마나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이 신파극들은 극장에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배우들은 마치 요즘의 스타들처럼 팬레터를 받고 사진 엽서까지 팔렸습니다.
당시 관객들은 극장에 들어가기 전 손수건을 준비했다는 말도 있을 만큼, 눈물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많았죠.

신파극의 대표적 인물로는 배우 이기세, 홍해성, 김도산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서울 종로의 단성사, 협률사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2. 100년 전의 한류 영화 – ‘아리랑’과 한국 최초의 흥행작들

1926년,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은 영화 《아리랑》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멜로도 아니고, 단순한 신파극도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민족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민족주의적 영화였죠.

《아리랑》의 주인공은 일제의 억압에 고통받는 청년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그는 결국 일본 경찰을 죽이고 체포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습니다. 이 영화는 검열을 피해 상영되었지만,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전국적으로 아리랑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외에도 나운규는 《벙어리 삼룡이》, 《옥녀》 등의 영화를 제작하며, 민족 영화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그가 활동한 시기는 지금의 K-콘텐츠에 비유될 만큼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영화관에서 직접 관객과 소통하며 해설(변사)을 하기도 했고, 그 인기는 오늘날의 유명 배우 못지않았습니다.

 

3. 변사의 시대 – 영화보다 더 인상 깊은 목소리

일제강점기 초기의 무성영화는 지금처럼 음향이나 대사가 없었습니다. 대신 영화 상영 시 스크린 앞에서 영화 내용을 설명하고 감정을 전달해주는 변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해설을 넘어서 영화 속 등장인물의 대사와 감정까지 직접 연기했고, 그 실력에 따라 영화의 흥행 여부가 결정되기도 했습니다.
일부 변사는 팬층을 형성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관객들은 특정 변사가 참여하는 상영회를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변사의 대표 인물로는 김용환, 최영일 등이 있으며, 변사들이 연출하는 목소리 연기는 무성영화의 ‘소리 없는 감동’을 되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더빙이나 내레이션, 혹은 영화평론가의 전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은 단순한 해설자를 넘어서는 하나의 예술가였습니다.

 

4. ‘극장’은 그 시절의 문화 중심지였다

지금은 대형 멀티플렉스가 익숙하지만, 1920~30년대에는 극장이 단순히 영화를 보기 위한 장소를 넘어 문화와 여가, 사회 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서울 종로에는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등이 있었고, 지방 도시에도 각종 극장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특히 단성사는 신파극과 초기 한국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며, 근대적 극장의 상징이 되었고, 그 앞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극장 주변에는 배우의 사진이 인쇄된 포스터, 전단지, 팬시 상품이 가득했고, 관객들은 극장을 찾는 일 자체를 일상의 중요한 이벤트로 여겼습니다.

또한 극장 무대에서는 연극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시 낭송 등 다양한 공연이 함께 이뤄졌고, 당시 문화의 ‘멀티 콘텐츠 플랫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마무리: 100년 전, K-드라마의 씨앗이 자라던 시대

일제강점기는 민족적으로 아픔이 가득했던 시기였지만, 그 안에서도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감성과 이야기를 지켜내려 노력했습니다.
신파극의 눈물, 아리랑의 분노, 변사의 열정, 그리고 극장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지금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K-드라마의 뿌리가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즐기는 감동적인 드라마와 영화 속에도, 바로 이 10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 본능이 흐르고 있는 셈입니다.